당근의 원래 색은 보라색이었다, 주황당근의 탄생과 베타카로틴
당근은 사실 처음부터 주황색이 아니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보라색 야생종부터 네덜란드의 품종개량, 제주 구좌당근이 겨울에 유독 맛있는 이유와 베타카로틴 흡수법까지 살펴봅니다.
당근은 김치냉장고 야채칸에서 가장 흔하게 마주치는 채소 중 하나지만, 정작 이 뿌리가 원래 어떤 색이었는지, 왜 유독 제주에서 겨울에만 수확되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당근은 홍당무라고도 불리지만, 우리말 ‘당근’의 정확한 어원은 분명하게 확정돼 있지 않다. 한자로 唐根이라 적는 경우가 있고 중국에서 들어온 뿌리채소라는 의미로 풀이하기도 하지만, 후대의 한자 표기일 가능성도 있어 어원을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흔히 당나라에서 전해져 당근(唐根)이라 불린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당나라(618~907) 때에는 당근을 재배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근거가 희박한 설로 본다.
미나리·파슬리의 친척, 뿌리를 먹는 채소
당근은 미나리, 파슬리, 셀러리와 같은 산형과(미나리과)에 속하는 두해살이 식물이다. 우리가 먹는 부분은 열매나 줄기가 아니라 땅속으로 곧게 뻗어 굵어진 원뿌리이며, 첫해에는 뿌리에 양분을 저장하고 이듬해에 꽃줄기를 올려 하얀 레이스 모양의 꽃을 피운 뒤 씨앗을 맺는다. 그래서 우리가 먹는 당근은 사실 식물이 아직 꽃을 피우기 전, 뿌리에 영양을 가득 저장해둔 1년차 상태의 모습이다.
당근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당근의 원산지는 서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친 지역으로,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이란, 중앙아시아 일대를 당근 재배의 기원지로 본다. 지금 우리가 아는 굵고 단단한 주황색 뿌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는데,야생 당근의 뿌리는 오늘날의 재배 당근보다 가늘고 질기며 색도 옅은 편이었다.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재배화되는 과정에서 보라색과 노란색 뿌리를 가진 당근이 널리 나타났고, 이것들이 후대 유럽 품종의 중요한 기반이 됐다. 이 야생종은 이후 12세기 무렵 아랍을 거쳐 스페인에 전해지고,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로 서서히 확산되며 유럽의 식재료로 자리잡아갔다.
왜 당근은 원래 주황색이 아니었을까
오늘날 가장 흔한 주황색 당근은 오랜 선발과 품종개량을 거쳐 고정된 재배형이다. 16~17세기 무렵 네덜란드에서 노란색과 보라색 당근 중 뿌리가 크고 속까지 균일하게 잘 물든 주황색 개체들을 골라 계속 교배하고 개량해 더 굵고 단맛이 강한 주황색 품종이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함께 전해지는데, 네덜란드의 독립을 이끈 ‘오렌지 공’ 가문을 기리기 위해 네덜란드의 상징색인 주황색 당근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보급했다는 설이 있다. 다만 이 일화는 여러 식문화사 책과 글을 통해 널리 퍼진 이야기일 뿐, 당시 기록으로 명확히 입증된 사실이라기보다는 품종개량의 역사와 함께 구전된 설에 가깝다는 점도 함께 알아둘 만하다. 분명한 것은 보라색이던 자생종 당근에서 노란색과 흰색 당근이 자연적으로 출현해 유럽에 전해졌고, 17세기 네덜란드 농부들에 의해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오렌지색 품종으로 개량됐다는 점이다. 쓴맛이 적고 단맛이 강하며 아삭한 식감을 지녔던 이 주황색 당근은 이후 유럽 전역과 아메리카 대륙으로 퍼지며 오늘날 당근의 표준이 되었다.

색을 만드는 베타카로틴, 당근의 구조
당근 뿌리를 가로로 잘라보면 가운데에 심처럼 보이는 단단한 부분(물관부)과 그 바깥을 둘러싼 부드러운 부분(체관부)이 뚜렷이 구분된다. 당근 특유의 주황빛은 카로티노이드 색소, 그중에서도 베타카로틴에서 비롯되는데, 카로티노이드는 뿌리 조직 전체에 분포하지만 바깥쪽 조직과 안쪽 심 부분의 함량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필요 이상으로 두껍게 껍질을 깎기보다 표면을 깨끗이 씻거나 얇게 손질해 이용하는 편이 식재료 손실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당근을 너무 두껍게 깎아내면 색과 영양이 집중된 부분을 함께 잃게 되는 셈이다. 품종과 재배 환경에 따라 색소의 종류와 양이 달라지면서 보라색·노란색·흰색·빨간색 등 다양한 색의 당근이 지금도 존재한다.
당근의 다양한 색과 국내 품종
마트에서 흔히 보는 주황색 당근 외에도 안토시아닌이 많아 보랏빛을 띠는 당근, 보라색 당근은 안토시아닌 계열 색소가 많고, 노란색 당근은 잔토필 계열 카로티노이드가 색에 관여한다. 흰 당근은 색소 함량이 상대적으로 적다., 색소가 거의 없는 흰 당근 등이 품종으로 남아 지금도 재배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제주 구좌 지역 농가들 사이에서 여름에 파종해 겨울에 수확하는 구좌 당근을 재배하며, 수확량은 다소 적지만 당도가 높고 식감이 좋은 ‘파라오’ 품종을 고집하는 농가가 많다. 색과 품종에 따라 단맛과 향, 수분감에 차이가 있어 생으로 먹었을 때의 아삭함이나 주스로 갈았을 때의 단맛이 조금씩 달라진다.

한겨울에 더 달아지는 이유, 제주 구좌당근
당근은 전국 여러 지역에서 재배되지만, 유독 겨울철 당근은 제주산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당근 주요 생산지는 강원도 평창, 경남 밀양과 김해 등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지만, 국내 겨울당근 생산은 제주가 대표적이며, 특히 구좌읍은 국내 겨울당근의 핵심 산지로 꼽힌다. 농촌진흥청 자료에 따르면 제주도가 전국 당근 재배 면적의 60%를 차지하며, 그중에서도 제주시 구좌읍이 제주 당근 재배 면적의 90%를 차지한다. 구좌 당근이 특별히 맛있다고 알려진 데는 토양의 역할이 크다. 화산활동에서 비롯된 흑색 화산회토가 많아 물빠짐이 좋고 유기물 함량이 높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 뿌리채소가 썩지 않고 양분을 고르게 머금기에 유리한 환경이 만들어진다. 여기에 겨울이라는 계절적 요인도 더해진다. 한겨울 땅위 기온은 차가운 반면 땅의 기온은 상대적으로 높게 유지되는데, 저온에서는 당근의 생육 속도가 느려지고 뿌리의 당 조성과 맛도 달라질 수 있다. 제주 겨울당근의 단맛은 품종뿐 아니라 서늘한 생육 환경과 수확 시기, 토양 조건이 함께 만들어내는 특성으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런 조건 덕분에 제주 구좌 당근은 늦가을부터 겨울을 거쳐 이듬해 초까지 수확된다.
영양성분, 100g 기준으로 살펴보면
미국 농무부(USDA) 자료에 따르면 생당근 100g은 약 41kcal의 열량을 내며 단백질 0.93g, 탄수화물 9.58g, 지방 0.24g을 함유한다. 수분 함량이 약 88%에 이를 만큼 대부분이 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식이섬유는 100g당 약 2.8g 정도로 측정된다. 당근을 대표하는 성분은 역시 베타카로틴으로, 비타민 C 5.9mg, 칼륨 320mg과 함께 베타카로틴이 8,285㎍ 들어있는 것으로 보고된다. 다만 이 수치는 품종과 산지, 성숙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국내 자료에서는 식품의약품안전처 기준으로 당근 100g에 베타카로틴이 7,620㎍ 함유된 것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베타카로틴은 우리 몸에서 비타민 A로 전환될 수 있는 성분으로 알려져 있어, 당근은 비타민 A의 좋은 공급원이 될 수 있는 채소로 평가된다.
당근을 많이 먹으면 피부가 주황색으로 변할까?
당근을 매우 많이, 오랜 기간 섭취하면 피부가 노란빛이나 주황빛을 띠는 카로틴혈증이 나타날 수 있다. 이는 베타카로틴 같은 카로티노이드가 피부의 각질층 등에 축적되면서 생기는 현상으로, 특히 손바닥이나 발바닥에서 잘 보인다. 황달과 달리 눈의 흰자위까지 노랗게 변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으며, 섭취량을 줄이면 서서히 원래 색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인 식사에서 당근을 먹는 정도를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당근의 주황색 색소가 실제로 사람 피부색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은 베타카로틴의 성질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생으로 먹을 때와 조리해서 먹을 때, 흡수율이 다르다
당근은 생으로 아삭하게 씹어 먹어도 맛있지만, 베타카로틴을 비타민 A로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싶다면 조리법을 고려해볼 만하다. 베타카로틴은 식물 조직 안에 갇혀 있어 생당근을 그대로 먹을 때보다 잘게 썰거나 갈고, 익혀 조직을 부드럽게 했을 때 몸에서 이용하기 쉬워질 수 있다. 여기에 소량의 기름을 함께 먹으면 지용성 카로티노이드가 소화 과정에서 미셀에 포함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어 체내 이용률이 더 높아질 수 있다. 이는 베타카로틴이 지용성 성분이기 때문인데, 비타민 A는 지용성이어서 기름과 함께 섭취할 때 흡수율이 높아지는 특성을 가진다. 그래서 당근을 올리브유나 들기름에 살짝 볶거나, 당근라페처럼 기름과 식초에 버무려 먹는 조리법이 영양 측면에서도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다만 당근에는 비타민 C를 산화시키는 효소가 함유되어 있어, 비타민 C가 풍부한 다른 채소와 생으로 함께 갈아 먹을 때는 이 점도 함께 고려할 만하다.
고르는 법과 보관하는 법
- 표면이 매끈하고 흠집이나 갈라짐이 없으며, 단단하게 힘이 느껴지는 것을 고른다.
- 색이 고르게 선명한 주황색을 띠고, 심지(중심부)가 지나치게 굵지 않은 것이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단맛이 좋다.
- 잎이 달려 있다면 잎을 바로 잘라내는 것이 좋다. 잎이 뿌리의 수분과 양분을 계속 끌어가 당근이 금방 물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신문지나 키친타월로 감싸 밀폐 용기나 비닐에 넣어 냉장 보관하면 수분 손실을 줄이며 비교적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당근은 단순히 늘 같은 자리에 있던 익숙한 채소가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의 거칠고 쓴 보라색 뿌리에서 출발해 사람의 손을 거쳐 지금의 달고 아삭한 주황색 뿌리로 다시 태어난 작물이다. 그 과정에서 네덜란드의 품종개량 역사가 얽혀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화산회토와 겨울 추위라는 제주만의 자연조건이 더해져 구좌 당근이라는 또 하나의 특산물을 만들어냈다. 평범해 보이는 주황색 뿌리 하나에 색의 역사와 토양의 비밀, 조리법에 따라 달라지는 영양까지 담겨 있는 셈이다. 다음에 당근을 깎을 때는 그 단단한 심과 선명한 색 안에 이런 여러 겹의 이야기가 쌓여 있다는 사실을 한 번쯤 떠올려봐도 좋겠다.
참고자료
- 농촌진흥청 자료(제주당근 재배면적·주산지 관련, 제주일보·제주신보 보도 인용)
- 식품의약품안전처 식품영양성분 데이터베이스(당근 베타카로틴 함량)
- USDA(미국 농무부) FoodData Central – Carrots, raw 영양성분 자료
- 제주특별자치도·제주관광공사 자료(제주물 돋보기 웹진, 구좌당근 재배환경)
- 농민신문 – 구좌 당근 재배 농가 취재 기사
- 당근의 역사와 품종개량 관련 식문화사 자료(네덜란드 오렌지색 당근 개량사)
- Royal Botanic Gardens, Kew, Plants of the World Online — Daucus carota 및 재배 당근의 기원·형태·색의 역사
- Nature Plants, 2023 — 당근 가축화와 고카로티노이드 주황색 당근의 기원에 대한 유전체 연구
- European Journal of Clinical Nutrition — 당근의 가열·분쇄·기름 첨가에 따른 베타카로틴 이용 가능성 변화
- Innovative Food Science & Emerging Technologies — 조리와 올리브유 첨가가 당근 카로틴 bioaccessibility에 미치는 영향
- 제주관광공사/Visit Jeju — 구좌당근의 화산회토 재배환경과 늦가을 수확 시기
원물알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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