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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 피 같은 즙의 정체는 안토시아닌이 아니라 베타레인이다

원물알리미

비트는 왜 자르면 선명한 붉은빛을 띨까요? 베타레인 색소의 정체부터 품종별 차이, 재배와 수확 시기, 먹고 나면 소변이 붉어지는 이유까지 비트의 모든 것을 살펴봅니다.

둥글고 단단한 뿌리를 칼로 가르면 마치 상처에서 피가 배어나오는 듯한 진한 자주색 즙이 흘러나온다. 생김새는 무와 비슷하지만 비트는 무가 속한 배추과가 아니라 명아주과(비름과)에 속하는 전혀 다른 채소다. 학명은 Beta vulgaris이며, 뿌리를 식용하는 채소로 길러지지만 같은 종 안에는 잎을 먹는 근대, 설탕을 만드는 사탕무까지 포함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흔히 ‘빨간 무’라고도 불리지만 식물학적으로는 무와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별개의 작물인 셈이다.

지중해 바닷가 풀에서 시작된 뿌리채소

비트의 야생 조상은 지중해와 대서양 연안의 모래땅에서 자라는 해안 식물인 해변비트(sea beet, Beta vulgaris subsp. maritima)다. 이 식물은 지중해 연안이 원산으로 추정되며 시간이 지나며 유럽 대서양 연안과 근동, 인도까지 퍼져 나갔고, 지금도 지중해와 대서양 해안에서 야생 상태로 발견된다. 흥미로운 점은 처음부터 뿌리 때문에 사랑받은 채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고대에는 야생형이 주로 잎을 먹기 위해 재배되었고 뿌리는 약용으로 쓰이는 정도였다.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비트를 잎채소로 재배했으며, 뿌리를 식용 작물로 키우기 시작한 것은 16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뿌리가 둥글고 통통하게 부풀어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해변비트가 지닌 독특한 생리적 특징 때문이다. 해변비트는 뿌리에 여러 개의 형성층(캄비움)을 겹겹이 갖고 있어, 이를 통해 뿌리가 둥글게 비대해지는 형질을 선발하기가 쉬웠다. 오랜 세월 사람의 손을 거치며 가늘고 길쭉하던 야생 뿌리는 점차 둥글고 큰 저장 뿌리로 바뀌었고, 이 과정을 거쳐 오늘날 사탕무, 사료용 비트, 근대, 그리고 우리가 흔히 먹는 테이블비트까지 모두 같은 종(B. vulgaris) 안의 서로 다른 재배 그룹으로 분화했다.

자르면 드러나는 붉은 고리무늬, 베타레인 색소의 정체

흙 위로 둥근 어깨를 드러내며 자라는 비트 뿌리와 짙은 초록 잎

비트의 가장 큰 특징은 단연 색이다. 이 색을 만드는 물질은 안토시아닌이 아니라 베타레인(betalain)이라는 독특한 질소 함유 색소다. 베타레인은 수용성의 액포 색소로, 명아주목(Caryophyllales)에 속한 일부 식물과 균류에서만 만들어지며 테이블비트도 여기에 포함된다. 베타레인은 다시 붉은보라색 계열의 베타시아닌과 노란색 계열의 베타잔틴으로 나뉘는데, 두 색소의 비율에 따라 뿌리의 최종 색이 정해지며, 베타시아닌 농도가 충분히 높으면 베타잔틴의 노란빛을 가리고 붉은색으로 보이게 된다. 같은 베타레인 계열이라도 베타레인은 질소를 포함한 화학구조와 생합성 경로에서 안토시아닌과 구분되며, 한 식물 안에서 두 색소가 동시에 만들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이 때문에 붉은 비트와 노란 비트는 같은 뿌리채소이면서도 전혀 다른 색소 조합을 지니는 것이다.

뿌리를 가로로 자르면 나이테처럼 보이는 동심원 무늬가 나타나는 품종도 있다. 이는 뿌리 속에 여러 겹의 형성층이 교대로 활동하며 색소가 진한 조직과 옅은 조직을 번갈아 만들어내기 때문으로, 품종에 따라 무늬의 진하기와 간격이 달라진다. 흰색에 가까운 품종은 이 색소 자체가 거의 없어 단면이 밋밋하게 보인다.

붉은 비트만 있는 게 아니다, 품종과 사탕무의 차이

레드비트, 골든비트, 줄무늬 비트를 반으로 잘라 단면의 무늬 차이를 비교한 모습

시중에서 흔히 보는 진자주색 뿌리 외에도 비트에는 여러 품종이 있다. 붉은 비트는 가장 널리 재배되는 유형이고, 황금빛을 띠는 골든비트는 베타잔틴 비중이 높아 색이 노랗게 나타나며, 자르면 흰색과 분홍색 줄무늬가 번갈아 나타나는 줄무늬 비트도 있다. 색소가 거의 없는 흰색 비트도 존재한다. 색이 다르다고 해서 영양이나 맛이 크게 차이 나는 것은 아니며, 색과 질산염 함량이 비례하는 것도 아니어서 황금비트도 붉은 비트 못지않은 질산염을 가질 수 있다.

한 가지 꼭 구분해야 할 것은 설탕의 원료가 되는 사탕무(sugar beet)다. 우리가 식재료로 먹는 테이블비트와 사탕무는 식물학적으로 같은 종이지만 용도에 맞춰 전혀 다르게 개량된 작물이다. 테이블비트는 당 함량이 약 6~9% 수준인 반면, 사탕무는 16~20%에 이르는 설탕 성분을 축적하도록 육종된 작물이다. 전 세계적으로 사탕무는 2019년 기준 2억 7,500만 톤 이상이 생산될 만큼 경제적으로 중요한 작물이지만, 식탁에 오르는 테이블비트는 이에 비해 재배 면적이 훨씬 작다.

서늘한 날씨를 좋아하는 비트, 언제 심고 거둘까

비트는 더위에 약하고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 호냉성 채소다. 발아에 적합한 온도는 11℃ 안팎이며 생육에 알맞은 온도는 13~18℃ 정도다. 국내 텃밭과 농가에서는 주로 봄과 가을 두 차례 재배하는데, 봄 재배는 3월 초부터 5월 하순 사이에 씨를 뿌려 5월 하순부터 7월 하순 사이에 거두며, 기온이 올라가는 6월 하순 이전에 수확해야 뿌리에 섬유질이 덜 생겨 부드러운 맛을 즐길 수 있다. 가을 재배는 8월 초에서 9월 하순 사이 파종해 10월 초부터 11월 하순 사이에 수확한다.

수확 적기를 가늠하는 기준은 뿌리의 굵기와 잎의 개수다. 잎이 7~8매 정도 자랐을 때가 가장 맛있는 시기로 알려져 있으며, 둥근 품종인 조생·중생종은 60~70일 만에 지름 3~5cm 정도로 자라 수확하고, 길쭉한 만생종은 100일 이상 키워 지름 7cm 이상일 때 거둔다. 수확이 늦어지면 뿌리 속에 질긴 섬유질이 자리 잡아 식감이 뚝 떨어지므로 적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또한 비트는 어릴 때나 다 자랄 무렵 낮은 온도에 오래 노출되면 뿌리 대신 꽃대를 올리는 추대 현상이 일어날 수 있어, 유묘기나 성숙기에 0~5℃ 정도의 저온이 일정 기간 이어지면 추대가 유발될 수 있으므로 재배 시기 조절에 유의해야 한다.

영양성분, 과장 없이 살펴보기

비트 뿌리(생것) 100g을 기준으로 할 때 단백질 2.2g, 지질 0.1g, 당질 9.1g, 섬유 0.8g, 회분 1.4g이 들어 있으며 무기질로는 칼륨 500mg, 칼슘 13mg, 나트륨 33mg, 인 25mg, 철분 0.4mg이, 비타민으로는 비타민B1 0.05mg, B2 0.05mg, 나이아신 0.3mg, 비타민C 4mg이 포함된다. 해외 식품성분표에서는 수치가 다소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는데, 100g당 에너지 43kcal, 탄수화물 9.56g, 당분 6.76g, 식이섬유 2.8g, 단백질 1.61g 수준으로 보고되며 엽산 함량이 하루 권장량의 27%에 해당하는 109μg에 이른다는 자료도 있다. 이처럼 품종, 산지, 재배 시기와 분석 기관에 따라 구체적인 수치는 다소 달라질 수 있다.

비트 뿌리에는 글라이신 베타인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어 항산화 물질로 연구되고 있으며, 베타인이라는 알칼로이드 성분이 이뇨 작용과 관련해 전통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또한 비트는 질산염 함량이 높은 식재료로 꼽히며, 특히 잎 부분에 질산염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질산염은 체내에서 일산화질소로 전환되는 경로가 연구 대상이 되고 있지만, 이는 아직 진행 중인 연구 영역으로 특정 질환의 예방이나 치료 효과를 단정할 근거는 아니다. 비트를 특정 질병에 대한 치료제처럼 여기기보다는, 다양한 채소와 함께 균형 잡힌 식단 안에서 활용하는 식재료로 바라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먹고 나면 소변이 붉어진다? 베투리아라는 현상

비트를 먹은 뒤 소변이나 대변이 분홍빛이나 붉은빛을 띠는 경험을 한 사람이 적지 않다. 이를 베투리아(beeturia)라고 부르는데, 비트나 비트 색소로 착색된 음식을 섭취하면 베타닌 같은 베타레인(베타시아닌) 색소가 소변으로 배출되며 붉거나 분홍빛을 띠게 되는 현상이다. 이 색 변화는 사람마다, 또 같은 사람이라도 섭취 시점에 따라 정도가 크게 달라지며 눈에 띄지 않을 수도, 뚜렷하게 나타날 수도 있지만 베투리아 자체는 위험한 현상은 아니다. 다만 혈뇨나 혈변으로 오인되기 쉽다는 점은 주의할 부분이다. 평소와 다른 색의 배출물이 계속되거나 다른 증상이 동반된다면 베투리아로 넘겨짚지 말고 진료를 받아보는 것이 안전하다.

식탁 위의 비트, 어떻게 쓰고 어떻게 고를까

비트는 생으로 얇게 썰어 샐러드에 넣거나 즙을 내어 마시기도 하고, 오븐에 굽거나 삶아서 부드럽게 익힌 뒤 으깨거나 수프에 넣는 방식으로도 널리 쓰인다. 동유럽의 대표적인 수프인 보르시(borscht)처럼 비트 특유의 색과 단맛을 살린 요리도 세계 각지에 자리 잡고 있다. 뿌리뿐 아니라 잎도 버리지 않고 활용할 수 있는데, 비트 잎에는 칼슘이 풍부해 뼈 건강 유지에 도움을 줄 수 있고 비타민A·E, 철분, 식이섬유도 들어 있다.

좋은 비트를 고를 때는 모양과 단면 상태를 함께 살피는 것이 좋다. 둥그스름하고 원만한 모양을 고르고, 수확한 지 얼마 안 된 것은 흙이 많이 묻어 있으며 잘랐을 때 붉은색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껍질이 단단하며 크기는 중간 정도인 것이 좋다. 딸려 온 줄기에도 영양소가 많으니 버리지 않는 것이 좋고, 비트 뿌리는 비교적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지만 구입 후 가급적 빨리 먹어야 맛과 영양이 모두 좋다. 보관할 때는 잎을 뿌리에서 분리해 따로 두면 뿌리가 수분을 덜 빼앗겨 더 오래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다.

해안가 들풀에서 시작해 약으로, 잎채소로, 그리고 마침내 붉은 뿌리채소로 자리 잡기까지 비트가 걸어온 길은 길고 느렸다. 고대인들이 거들떠보지 않았던 뿌리는 로마 시대를 거치며 서서히 몸집을 불렸고, 16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지금 우리가 아는 둥글고 진한 비트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색소 하나로 품종이 갈리고, 설탕의 원료가 되기도 하는 같은 종의 다른 얼굴을 지녔다는 점도 비트를 들여다볼수록 흥미로운 지점이다.

무심코 자른 단면에서 피처럼 배어나오는 즙과, 먹고 난 뒤 화장실에서 마주하는 붉은 흔적은 비트가 가진 베타레인 색소의 힘을 몸으로 확인하는 순간이다. 과장된 효능보다는 이 색소와 뿌리채소로서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나면, 비트는 더 이상 낯선 ‘빨간 무’가 아니라 식탁 위에서 제 역할을 하는 하나의 채소로 다가온다.

참고자료

  • 농촌진흥청 농사로 – 채소 양채류 비트의 특성 및 영양학적 가치
  • 농림축산식품부 식품나라(foodnuri) – 제철농식품 비트 구입요령
  • Missouri Botanical Garden Plant Finder – Beta vulgaris
  • NCBI PMC – Evolution of Root Morphology in Table Beet: Historical and Iconographic Studies
  • 미국특허청(USPTO) 특허문서 – Methods of producing decolorized beet products and compositions produced therefrom / High pigment golden beets
  • 위키백과 – 비트 (식물) 영양성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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