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와 피망,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두 얼굴
향신료로 분류되지만 샐러드로 먹는 파프리카, 그 이중적 정체성은 어디서 왔을까요? 피망과의 차이, 색깔별 영양 차이, 재배와 보관법까지 살펴봅니다.
마트 채소 코너에서 흔히 만나는 파프리카는 사실 분류상으로는 향신료에 가깝습니다. 헝가리에서 이 이름이 처음 쓰였을 때 가리킨 것은 고추를 말려 곱게 간 붉은 가루, 즉 향신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아삭하게 썰어 샐러드에 넣거나 생으로 베어 먹는 그 빨갛고 노란 열매에도 똑같이 파프리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같은 이름이 가루와 생채소를 동시에 가리키게 된 사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 열매가 고추속 식물 중에서도 꽤 독특한 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헝가리를 거쳐 한국 온실까지, 이름의 여정
파프리카의 식물학적 뿌리는 중남미 대륙입니다. 고추속 식물이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16세기경 터키를 통해 처음 헝가리에 도입됐을 때는 식용이 아닌 관상용이나 약초로 쓰였고, 당시 귀족들이 즐기던 값비싼 후추를 구할 수 없었던 평민들이 고추를 말려 가루로 만들어 쓰기 시작한 것이 헝가리 파프리카 가루의 시작이었습니다. 고추를 뜻하는 세르비아어 파파르(Papar)가 헝가리로 넘어오면서 파프르카(Paprka)를 거쳐 지금의 파프리카(Paprika)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헝가리의 생화학자 알베르트 센트죄르지가 헝가리 파프리카에서 다량의 비타민 C를 추출하는 데 성공해 1937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으면서 파프리카는 헝가리 식문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채소로 먹는 통통하고 단맛 나는 파프리카는 이 가루의 원료가 된 고추와는 결이 다른, 비교적 최근에 개량된 품종입니다. 원산지가 중앙아메리카인 파프리카는 1995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재배되기 시작했으며, 매운맛이 없는 블로키 타입의 유럽종 수출용 착색단고추를 파프리카라 부르고 있다는 설명이 있고, 다른 자료는 1994년 항공기 기내식용으로 제주도에서 처음 재배되기 시작했다고 전하는 등 정확한 도입 시점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1990년대 초중반 네덜란드의 시설원예 기술과 함께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식 이름을 그대로 들여와 부르면서, 1930년대부터 이미 들어와 있던 프랑스식 이름의 피망과는 다른 작물처럼 불리게 되었습니다.
피망과는 무엇이 다를까?
마트에서 피망과 파프리카를 나란히 보면 결국 궁금해지는 것이 두 채소의 관계입니다. 농촌진흥청의 비교 분석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Capsicum annuum을 개량한 고추들이 피망이나 파프리카로 불리며 원산지는 중남미이고, 피망은 프랑스어, 파프리카는 네덜란드어로 유럽에서는 두 단어가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즉 식물학적으로는 거의 같은 종류이지만, 한국에 들어온 경로와 시기가 달랐던 탓에 별개의 채소처럼 자리 잡은 것입니다. 실제 품질 차이도 분명합니다. 파프리카는 과피의 두께가 피망보다 두껍고 둥글지만 피망은 길쭉한 것이 특징이며, 파프리카가 아삭아삭함과 당도가 1.5~2배 정도 높고 좀더 선명한 색을 가진다는 것이 농진청의 분석 결과입니다. 조리를 해도 이 차이는 어느 정도 유지되는데, 조리 후 씹히는 질감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도 함께 확인되었습니다. 결국 피망은 껍질이 얇고 은은한 쓴맛이 남아 있는 전통적인 단고추, 파프리카는 그것을 더 달고 두껍게 개량한 품종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왜 색깔이 이렇게 다양할까?

파프리카 매대에 놓인 빨강, 노랑, 주황, 초록은 서로 다른 채소가 아니라 대부분 같은 열매가 익어가는 단계이거나, 특정 색으로 완숙하도록 육종된 품종입니다. 파프리카는 초록색에서 시작해 재배 기간에 따라 색이 달라지며, 완전하게 성숙하면 빨간색이 된다는 것이 기본 원리입니다. 다만 모든 품종이 빨간색으로 완숙하는 것은 아니어서, 노랑이나 주황으로 완숙하도록 육종된 품종도 따로 존재합니다. 실제 국내 농가에서도 10월 중순경 씨를 뿌려 이듬해 1월부터 8월까지 수확하며, 재배 품종은 붉은색 계열, 노란색 계열, 주황색 계열을 섞어 심는 방식을 쓰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파프리카 끝부분이 네 갈래로 갈라지면 암컷, 세 갈래면 수컷이라는 속설인데, 파프리카 끝 부분의 갈래 모양이 암수를 가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재배 환경에 따라 달라질 뿐이라는 점도 함께 알아둘 만합니다.
온실 속에서 자라는 까다로운 작물
파프리카는 노지에서 키우기 어려운 작물입니다. 노지에서는 재배하기가 어려우므로 비가림 하우스를 이용해 심으며, 고추와 마찬가지로 육묘 기간이 60~80일 정도 소요되고 충분히 온도가 확보된 후에 정식한다는 것이 기본 재배 방식입니다. 생육 중에는 온도 관리가 특히 중요해서, 밤 온도가 최소 18℃ 이상 유지돼야 하고 생육단계에 따라 양분과 수분 관리가 필요해 시설에서 토양 또는 수경으로 재배합니다. 반대로 여름철 고온은 파프리카에게 가장 큰 위협인데, 온실 내부 기온이 35℃ 이상 오르면 꽃가루 활력이 떨어져 정상적으로 열매가 달리지 않고 햇빛에 데는 피해나 배꼽이 썩는 현상이 많이 발생합니다. 이 때문에 평지 농가 대부분이 6~8월에는 파프리카를 재배하지 못해 생산 공백기가 생기는 문제가 있었지만, 최근에는 뿌리 부분만 냉각하는 기술이 개발되어 고온기에도 안정적인 생산이 가능해지는 추세입니다. 수확은 열매가 완전히 색을 갖춘 뒤 이루어지는데, 꽃이 피고 50~60일 전후하여 과실이 충분히 품종 고유의 색을 나타낼 때 수확합니다.
색깔마다 달라지는 영양성분

파프리카는 국내 채소 중에서도 비타민C 함량이 두드러지는 품목으로 꼽힙니다.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이 발표한 분석에 따르면 비타민C, 베타카로틴, 식이섬유, 칼륨 함량이 풍부하며 콜라겐을 합성하고 항산화제로 작용하는 비타민C는 초록색 파프리카에 100g당 162mg으로 가장 많이 들어있고, 주황색 116mg, 노란색 111mg, 빨간색 92mg 순이라고 합니다. 이는 다른 과일과 비교해도 상당히 높은 수치로, 초록 파프리카에 들어있는 비타민C의 양은 레몬(100g당 52mg)의 3.1배, 오렌지(100g당 43mg)의 3.8배에 이릅니다. 다만 같은 국립농업과학원 자료라도 측정 시료나 연도에 따라 수치는 다소 달라질 수 있어서, 다른 분석에서는 파프리카 100g당 비타민C 함량을 주황 116.29mg, 노랑 110.6mg, 빨강 91.75mg 순으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전반적으로 색이 옅을수록, 즉 덜 익은 초록색일수록 비타민C 함량이 높고 완숙되어 빨개질수록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열매뿐 아니라 잎도 영양적으로 주목받는데, 파프리카 16품종의 잎에 대한 식후 혈당 상승 억제 물질(AGI) 활성을 분석한 결과 12.8~38.7%로 풋고추 잎 못지않게 높게 나타났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 파프리카 잎을 나물이나 볶음으로 활용하는 것도 영양 면에서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먹고 고르고 보관할까?
파프리카는 두꺼운 과육과 아삭한 식감 덕분에 생으로 먹기에 좋아, 샐러드나 스틱 형태로 그대로 즐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외에도 샐러드드레싱, 생선·쇠고기·닭고기로 만든 수프, 달걀 요리, 채소 요리, 케첩, 칠리소스 등의 조미료를 만드는 데 폭넓게 쓰입니다. 잎 역시 고춧잎과 맛과 식감이 비슷한 만큼 고춧잎처럼 나물이나 볶음, 튀김 등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고를 때는 표면에 윤기가 돌고 꼭지가 마르지 않은 것, 눌렀을 때 단단한 것을 고르는 것이 좋고, 수확 후에는 온도 10℃, 상대습도 90% 정도의 조건에서 저장하는 것이 품질 유지에 유리합니다. 가정에서는 비닐이나 밀폐용기에 담아 냉장 보관하되 너무 오래 두면 수분이 빠지며 물러지므로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소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수출 효자 품목에서 대중 채소로
파프리카는 한국 농산물 수출사에서 꽤 상징적인 품목입니다. 국내에서 생산된 파프리카의 절대 다수는 일본으로 수출되는데, 최근 통계에서도 2026년 9월 기준 최대 수출 국가는 일본으로 전체 수출의 99.3%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수출 비중은 예전만 못한데, 2010년대 후반 한때 연간 3만 톤을 넘겼던 수출량이 2010~2023년 연평균 2만6695t으로 집계되며, 2010년 1만7054t에서 2019년 3만5661t까지 늘었다가 이후 2021년 2만7969t, 2023년 2만1997t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엔저와 일본 내 수요 둔화가 주된 원인으로 꼽히지만, 그만큼 국내 소비 비중은 커지고 있어 고급 기호 과채류로 인식됐던 파프리카가 대중적인 과채류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주산지로는 경남 진주·함안 일대와 강원 지역이 꼽히는데, 2025년 기준 경남은 전국 파프리카 생산량 1만4920톤 가운데 6594톤, 43%를 생산했으며 이 중 함안이 1676톤을 차지했습니다.
향신료 가루로 시작해 샐러드 위 아삭한 조각으로 끝나는 파프리카의 여정은, 하나의 식물이 문화와 품종 개량을 거치며 얼마나 다른 얼굴을 갖게 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헝가리의 매운 고추 가루와 한국 온실에서 유리벽을 타고 자라는 달콤한 열매는 식물학적으로는 가까운 친척이지만, 각자의 땅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식탁에 오르게 된 셈입니다.
결국 파프리카를 하나로 정의하기보다는, 색과 품종과 쓰임에 따라 달라지는 다층적인 채소로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초록에서 빨강으로 익어가는 하나의 열매 안에 비타민과 카로티노이드의 변화가 담겨 있고, 피망과의 미묘한 차이 안에는 한 세기에 걸친 품종 개량의 역사가 있으며, 일본 수출 시장의 부침 안에는 국내 시설원예 산업의 성장과 한계가 함께 녹아 있습니다. 다음에 마트에서 색색의 파프리카를 고를 때는 그저 예쁜 채소가 아니라, 이런 여러 겹의 이야기를 품은 열매라는 점을 떠올려 볼 만합니다.
참고자료
-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 파프리카 영양성분 및 색깔별 비타민C 함량 보도자료
- 농촌진흥청 – 피망과 파프리카의 식품학적 특징 비교 연구
-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 파프리카 색깔별 비타민C 함량 분석
- 제주특별자치도농업기술원 – 파프리카 재배 자료
- 농림축산식품부, 한국농촌경제연구원 – 파프리카 재배면적·생산량 통계
- KATI 농식품수출정보 – 파프리카 수출입 동향(2025~2026)
- 농넷(NongNet) 농산물유통 종합정보시스템 – 파프리카 수출입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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