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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추는 왜 같은 열매인데 색이 다를까? 흑후추·백후추·녹후추의 비밀과 피페린까지

원물닷컴 에디터

후추는 사실 한 가지 열매입니다. 언제 따고 어떻게 말리느냐에 따라 흑후추·백후추·녹후추로 갈리는 이유와 매운맛을 내는 피페린, 고르고 보관하는 법까지 살펴봅니다.

후추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향신료지만, 정작 우리가 아는 흑후추와 백후추, 녹후추가 서로 다른 식물이 아니라 단 하나의 열매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언제 수확하고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같은 열매가 전혀 다른 색과 향을 가진 향신료로 갈라지는 것, 이것이 후추를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후추나무는 어떤 식물일까

후추는 후추과(Piperaceae)에 속하는 덩굴성 식물 Piper nigrum의 열매입니다. 목질 줄기가 최대 10m까지 자라는 여러해살이 덩굴로, 줄기가 자라면서 마디마다 공중뿌리를 내려 나무줄기 같은 구조물에 붙잡고 타고 오릅니다. 잎은 넓은 타원형으로 13~25cm 길이에 끝이 뾰족하고, 윗면은 짙고 광택 있는 초록색이며 아랫면은 연한 초록색을 띱니다. 여름이면 잎겨드랑이에서 길게 뻗은 이삭 모양의 꽃차례가 나오는데, 작고 꽃잎이 없는 노르스름한 초록색 꽃들이 이삭 모양으로 피며, 자웅동체이지만 간혹 단성화이기도 합니다. 이 꽃이 지고 나면 작고 둥근 열매가 촘촘히 매달리며, 꽃이 진 자리에는 둥근 열매가 맺혀 붉은색으로 익어갑니다.

열매 하나하나는 식물학적으로 핵과(核果)에 해당합니다. 완전히 익은 신선한 열매는 지름 약 5mm의 진한 빨간색을 띠며, 그 안에 씨앗 한 개가 든 단단한 속씨가 들어 있습니다. 즉 우리가 통후추라고 부르는 낱알 하나하나는 열매의 껍질과 과육, 그리고 그 속에 든 씨앗이 함께 말라붙은 것입니다.

덩굴줄기에 매달린 후추 이삭에 초록빛과 붉은빛 열매가 함께 달려 있는 모습

인도 서고츠산맥에서 시작된 향신료

후추의 고향은 인도 케랄라주의 서고츠산맥으로, 이 지역 산악지대에서 야생으로 자란다. 남인도의 말라바 해안이 원산지로 꼽히며, 오늘날에도 인도는 흑후추의 주요 생산국이며 케랄라의 말라바와 텔리체리 지역 후추는 향과 매운맛으로 특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다만 지금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브라질, 인도가 세계 후추 생산을 주도하고 있다.

후추가 유럽으로 전해진 뒤 벌어진 역사는 향신료 하나가 세계사를 흔든 대표적 사례입니다.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 항로 개척에 나서게 만든 향신료가 바로 후추였고, 중세 유럽에서는 후추의 높은 가격 때문에 ‘후추로 지불하는 지대’라는 말이 화폐나 지참금 대신 쓰일 만큼 귀했으나, 오늘날 이 표현은 정반대로 사실상 공짜라는 뜻으로 쓰인다.

한국에 후추가 들어온 정확한 시기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고려 중기 인물인 이인로의 파한집에 후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 중엽에는 이미 후추가 쓰이고 있었다는 견해가 있으며, 문헌 기록은 없지만 그 이전 신라시대에 당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전래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조선시대에는 후추가 상당히 귀한 대접을 받았는데, 연회에서 손님이 후추를 상에 올리면 기녀들이 다툴 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이름의 유래도 흥미로운데, ‘호초(胡椒)’라는 이름은 오랑캐 땅에서 나는 산초라는 뜻에서 왔습니다.

같은 열매, 다른 색: 흑후추·백후추·녹후추

후추의 색깔 차이는 품종이 아니라 수확 시점과 가공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Piper nigrum 한 그루에서 흑후추뿐 아니라 백후추, 녹후추, 적후추까지 모두 나오며, 이 차이는 수확 시기와 가공 방법에 달려 있습니다.

흑후추는 아직 덜 익은 상태로 수확한 열매를 삶고 말려 만드는데, 주름지고 색이 진한 것이 특징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열매를 따서 뜨거운 물에 약 10분간 담갔다가 대나무 발 위에 펼쳐 햇볕에 널고, 이후 2주가량 뒤집어 가며 말린 뒤 포장한다. 이 건조 과정에서 아직 초록빛을 띠는 덜 익은 후추를 수확해 뜨거운 물에 데치면 세포벽이 파괴되고 효소가 반응하기 시작한다. 이 검게 변하는 현상은 흑후추 특유의 색과 향에 기여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그 과정에서 폴리페놀 산화효소 활성과 폴리페놀 함량, 비타민 C·엽록소 함량이 함께 줄어드는 것으로 연구되었습니다.

백후추는 정반대로 완전히 익을 때까지 기다린 뒤 만듭니다. 열매가 완전히 붉게 익을 때까지 기다려 수확한 뒤 며칠간 물에 담가 껍질을 문질러 벗겨내면 하얀 속살이 드러납니다. 이 과정에서 껍질에 포함된 향미 성분이 함께 빠져나가고, 물에 담그는 동안 발효에 가까운 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흑후추와는 향이 상당히 달라집니다. 그 결과 백후추는 흑후추보다 날카롭지만 향의 강도는 더 약한 편입니다.

녹후추는 완전히 익기 10~15일 전, 아직 덜 여문 열매를 수확해 초록빛이 유지되도록 가공한 것입니다. 주로 소금물이나 식초에 절이거나 동결건조해 신선하고 풀 같은 향을 살립니다. 시중에서 가끔 보이는 붉은 후추, 즉 적후추는 후추나무 열매가 아닌 경우가 많아 주의가 필요합니다. 흔히 핑크페퍼로 불리는 것은 실제로는 전혀 다른 식물인 Schinus 속 나무 열매로, 과일 같고 살짝 꽃향이 나는 풍미와 화사한 색을 더해줍니다.

흑후추, 백후추, 녹후추를 나란히 담아 색과 질감의 차이를 보여주는 모습

매운맛의 정체, 피페린

후추를 씹었을 때 느껴지는 알싸하고 톡 쏘는 자극은 미각이 아니라 통증 감각에 가깝습니다. 이 자극을 만드는 주성분이 피페린(piperine)이라는 알칼로이드입니다. 백후추와 흑후추 모두 Piper nigrum의 말린 열매로 만들어지며, 두 종류 모두 비슷한 양의 피페린을 함유하고 있고 이 성분이 후추의 얼얼하고 매운 감각을 만들어냅니다. 다만 매운 강도는 조금씩 다른데, 여러 색의 페퍼콘 사이에는 미묘한 맛의 차이가 있어 검은색이 가장 자극적이고 흰색이 더 구수한 맛을 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피페린은 후추 특유의 향신료로서의 정체성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오랜 세월 남아시아의 아유르베다·싯다·유나니 전통의학에서 흑후추 열매가 소화계 문제, 특히 기생충 구제를 위한 치료제로 쓰여왔습니다. 다만 이런 전통적 활용과 현대 의학적으로 확립된 효과는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으며, 후추가 특정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최근에는 피페린이 다른 성분의 체내 흡수를 돕는 보조 성분으로 연구되는 경우가 많아, 건강기능식품에서 다른 생리활성 성분과 함께 배합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영양성분은 어떨까

흑후추는 향신료치고 미네랄 함량이 상당히 조밀한 편입니다. 100g당 약 251kcal의 열량을 내며 단백질 약 10.4g, 탄수화물 약 64g, 지방 약 3.3g을 함유합니다. 망간(1일 기준치의 554%), 구리(148%), 비타민K(136%), 식이섬유(90%), 철분(54%), 마그네슘(41%)의 우수한 공급원으로 평가됩니다. 물론 이는 향신료 특성상 한 번에 소량만 섭취하는 식재료이므로, 실제 한 끼 식사에서 후추를 통해 섭취하는 절대량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즉 후추는 매일 몇 그램씩 먹는 음식이 아니라 요리에 향과 자극을 더하는 조미료이므로, 위 수치는 어디까지나 100g 환산 기준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어떻게 쓰고, 어떻게 고를까

후추는 형태에 따라 쓰임이 갈립니다. 검은 통후추는 매콤한 향이 강해 고기 요리에 잘 어울리고, 흰 통후추는 향과 맛이 순해 흰살생선이나 닭고기, 크림소스 요리에 잘 맞습니다. 색이 진하고 요리의 완성된 색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음식에는 흑후추를, 크림수프나 흰살생선처럼 검은 알갱이가 도드라지면 안 되는 요리에는 백후추를 쓰는 식으로 구분하면 됩니다. 시중에서 파는 흰색 통 안에 든 하얀 후춧가루 중 일부는 실제 백후추가 아니라 공장에서 흑후추를 곱게 갈아 가열 살균 포장한 제품인 경우가 있어, 향미가 손상되어 있을 수 있으므로 향이 중요하다면 진짜 흑후추를 쓰는 편이 낫습니다.

향을 가장 잘 살리는 방법은 미리 갈아둔 가루보다 통후추를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갈아 쓰는 것이며, 이렇게 하면 향이 훨씬 살아나고 드레싱에 넣으면 기름의 산화를 억제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통후추는 밀폐 용기에 담아 직사광선과 습기를 피해 서늘한 곳에 두면 향이 오래 유지되며, 일단 갈고 나면 휘발성 향 성분이 빠르게 날아가므로 소량씩 갈아 바로 쓰는 것이 좋습니다.

세계사를 바꾼 작은 열매

지름 5mm짜리 이 작은 열매가 대항해시대의 항로를 열고, 유럽의 화폐 대신 거래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의 흔한 후추통을 다시 보게 만듭니다. 한 그루의 덩굴에서 열리는 열매 하나가 언제 따고 어떻게 말리느냐에 따라 흑후추의 강렬함과 백후추의 은근함, 녹후추의 싱그러움으로 갈라진다는 사실은 후추가 단순한 조미료를 넘어 가공의 기술이 담긴 향신료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흔하게 손이 가는 후추통 속 검은 알갱이는 인도 서고츠산맥의 덩굴에서 시작해 대양을 건너온 오랜 무역과 문화의 산물입니다. 다음에 스테이크나 국물 요리 위에 후추를 갈아 뿌릴 때, 그 알싸한 향 속에 담긴 열매의 색과 가공의 이야기를 한 번쯤 떠올려봐도 좋을 것입니다.

참고자료

  • Kew Science, Plants of the World Online – Piper nigrum L.
  • 위키백과 – 후추
  • Missouri Botanical Garden, Plant Finder – Piper nigrum
  • Botanische Tuinen (NVBT) – Black Pepper
  • iPlantz – Piper nigrum (Black Pepper)
  • PMC – Contribution of Polyphenol Oxidation, Chlorophyll and Vitamin C Degradation to the Blackening of Piper nigrum L.
  • PMC – Preliminary Study of Pepper Types Based on Multielement Content Combined with Chemometrics
  • USDA FoodData Central – Spices, pepper, black (foodnutri.com 정리 자료)
  • healthtips.kr – 백후추와 흑후추 비교
  • 아하(a-ha) 지식답변 – 후추의 원산지와 한국 전래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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